이재호칼럼,대통령의 ‘지속가능한 대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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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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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지속가능한 대북정책’

문재인 대통령이 격분했다고 조선일보가 지난 9일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북한이 지대함(地對艦) 순항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원산 인근에서 동해로 쏜 다음 날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했고, 북한에 대한 규탄과 경고를 쏟아냈다. 그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어떻게든 잘해 보려는 자신의 선의(善意)에 늘 이런 식으로 나오니 실망도 컸을 것이다. 취임 한 달 만에 미사일 발사만 벌써 다섯 번째다.
대통령은 NSC회의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근원적이고 창의적인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 측은 “북한의 반복적 도발과 우리의 기계적 대응이 일상화된 상황에 대통령이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정확한 인식이고 바른 처방이다. 미사일 발사→NSC 소집→대북 규탄→유야무야로 이어지는 뻔한 패턴에 국민은 질려 있다. 뭔가 의미 있는 방책이 나와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 정권의 초기 성패가 걸려 있다.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우선 진보 측의 겸허한 자기성찰이 선행됐으면 한다. 진보가 지난 10년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대북정책에 가했던 공격은 전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혹독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두 정권은 “대화보다 대결을 부추기고, 북한붕괴론에 기대어 흡수통일이나 노리는 보수 반동정권”에 불과했다. 입만 열면 “대화다운 대화 한 번 못 해본 정권”이라고 힐난하고 조롱했다.
당시엔 북한의 핵실험이 본격화되던 때였다. 이명박 정권 때 두 차례(2009년 5월 25일, 2013년 2월 12일), 박근혜 정권 때 두 차례(2016년 1월 6일, 2016년 9월 9일), 모두 네 차례의 핵실험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진보라도 대화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대화 안 한다”고 윽박질렀다. 정치공세, 이념공세의 냄새마저 풍겼다.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사정은 바뀌었다. 이젠 그들이 집권세력이 됐다. 대화를 할 수 있는 당사자가 된 것이다. 벌써 총출동이라도 한 듯싶은 분위기다. 일제히 “북핵도, 남북문제도 대화로 풀어야 하고 또 풀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고 실제로 대화가 활발히 이뤄질 것 같지도 않다. 대통령부터 ‘제재와 대화의 병행’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유는 자명하다. 북핵 때문이다. 한반도 시계는 이미 북핵 전(前)과 후(後), 오직 두 시간대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드(THAAD)에 묶여 안팎곱사등이인데, 북은 핵보유국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남북이 판문점에서 오순도순 이산가족을 상봉하고 비료를 맞바꾸기도 했던 목가적 남북시대는 갔다. 모든 것이 북핵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좁은 운동장뿐이다. 이 운동장에 홀로 서서 대화를 외친다고 다시 평평해질까.
사정이 이렇다면 새 정권도 이·박 정권과 특별히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사실 진보가 내심 가장 두려워했던 게 바로 이거였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핵과 연계돼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 말이다. 진보가 혀를 찼던 ‘남북관계 10년 장기 경색’도 이 ‘연계’ 때문에 비롯된 것인데, 이제 그들에게 닥칠 현실이 됐다.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토록 무시하고 폄훼했던 전 정권의 대북정책과 비슷하게 갈 수밖에 없다는 게.
진보가 이런 현실을 수긍할까. 그럴 개연성은 없다. 오히려 엇나갈 수 있다. 경험상 이럴 때일수록 그들의 자기주장은 더 강해진다. 일종의 오기(傲氣)다. 그 오기가 어쩌면 개성공단 조기 재개 같은 강수를 통해 표출될 수도 있다. 대통령의 뜻과는 달리 말이다.
문 대통령이 주변 진보인사들에게 흔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누가 뭐래도 지금은 ‘대북 제재와 대화의 병행’을 선언한 대통령의 현실 인식과 처방이 옳다. 핵(核)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대화’라는, ‘민족’만큼이나 진부한 감성적 언어만으로 단숨에 되돌려놓기는 어렵다. 그렇게 믿는다면 나이브하거나 오만한 것이다. 이런 걸 도덕적 허영심(moral vanity)이라고 한다.
단언컨대, 진보가 대통령에게 권할 다음 아이템은 일괄타결이 될 것이다. 모든 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한 번에 매듭짓자는 패키지 딜(package deal) 말이다. 진보는 DJ(김대중 전 대통령) 이래 일괄타결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해왔다. 뭐가 잘 안 되면 ‘일괄타결’이다. 이미 진보 쪽에선 ‘선 핵동결, 후 일괄타결’ 논의가 무성하다. 북에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철지난 유화책이다.
이건 대통령이 지시한 근원적 방안도, 창의적 방안도 아니다. 일괄타결은 기껏해야 언론용이다. 한 바구니에 담았으니 메모할 게 많고, 논문처럼 체계가 잡혀 있으니 발표하기에 좋다. 진보가 일괄타결의 전범(典範)으로 자랑하는 2005년 9·19선언은 채택과 동시에 휴지가 됐다. 대화를 서둘러선 안 된다. 전 정권과의 차별화만을 위한 대화라면 더욱 그렇다. 문 대통령이 주문한 창의적 방안은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의 눈으로 찾아내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혜를 빌릴 때 나온다. 진보인사들처럼 전 정권 10년을 통째로 부정해선 자기 손해다. 그 불임(不姙)의 시공간 속에서도 남북관계의 원칙을 세우려고 했고, 무엇보다 무절제한 대북지원을 자제하려는 노력

[사진=이재호]

이 있었다. 그런 것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한 대북정책의 기초가 닦인다. 문 대통령이 그 첫 삽을 떠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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