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정치가다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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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2-09 16:18 조회4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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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다움에 관하여
1.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이끌 정치가를 시민이 선출하고 그에게 일정 기간 공적 사업의 책임을 맡기는 체제를 가리킨다. 정치가, 즉 선출직 공직 후보자를 길러내는 역할은 정당이 한다. 정당 운영에 필요한 경비의 상당 부분은 국고에서 지원하며, 정당 리더는 국가를 운영하는 공동 책임자로 존중된다. 따라서 신뢰할만한 정당이 있는가, 존경받는 정치가가 있는가, 권위 있는 지도자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상태를 따져볼 수 있는 중심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정치의 실종’을 넘어 ‘정치가의 실종’을 걱정한다. 정치의 세계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 출신들이 각축하는 장이 되었다. 언론인 출신 의원들이 억지 싸움을 부추긴다. 그들도 조사와 처벌 같은 공안 언어를 즐겨 동원한다. 행정부 운영자는 물론이고 입법자들조차 고소와 고발을 남발한다.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법치가 들어섰다고 해야 할까. 법 집행을 둘러싼 공방이 어느덧 한국 민주주의를 집어삼켰다. 정치가 마땅히 해결하고 개선해야 할 과제들은 국회 밖 거리로 내몰리고, 그에 비례해 사회는 더 깊이 분열되고 있다.
법률가는 행해진 일을 다룬다. 반면 정치가는 행해져야 할 일을 다룬다. 법률가의 시선이 과거 행해진 것들에 두어진다면, 정치가의 시선은 개선된 미래를 향해 있다. 이미 행해진 일에 법 조항을 적용하는 일과, 향후 행해져야 할 일을 위해 법을 만들고 정책을 논의하고 예산을 수립하는 일은 같을 수가 없다. 처벌과 청산의 방법으로 정치를 다루면 어느 사회든 과거에 갇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이해했다고 해도 정치가가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하는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좋은 정치가가 되는 일은 언제든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1백 년 전,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정치가를 망치는 악마의 속삭임을 ‘남 탓하는 일’에서 찾았다.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 정치가에게서 듣게 되는 것은 개탄과 변명이다. 그들은 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세상의 비열함에 있다.”라는 알리바이에 의존한다. 역사 탓, 과거 탓, 여당 탓, 야당 탓은 그들이 즐겨 악용하는 소재들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민중의 대표이자 호민관으로서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먼, 사나운 표정과 공허한 내면뿐이다. 그래서 베버는 그런 정치가를 향해 “정치가의 명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이 자기 책임을 거부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도 없으며 또 해서도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인생이란 모든 가능성이 막혀 있는 순간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예비해 놓고 있는 놀라운 여행이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 동료 시민들에게 이를 말할 수 있는 사람, 냉소주의와 허영심에 빠지지 않는 사람, 변화와 개선을 위해 나날이 진보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정치가가 된다. 그런 사람에게서 우리는 비로소,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art of possibility)”이라고 정의했던 옛 성현들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
2.
정치란 특별한 인간 활동이다, 정치는 경제 논리나 법리 같은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독립적 기반을 갖는다. 피치자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통치가 이루어지는 군주정이나 귀족정과는 달리 민주정은, 피치자가 자신을 닮은 정치가를 뽑아 시민 사업을 맡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혈통이나 세습의 원리가 아닌 선출의 원리로 우리 스스로 권위를 부여한 자는 오로지 정치가뿐이다.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시민 삶을 위해 애쓰고 헌신하는 것을 소명이자 보람으로 삼는 자가 정치가다. 그는 변화와 개선을 주도하는 자이지,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하는 자가 아니다.
사회주의자로부터, 하다못해 민주주의자들로부터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 정치다. 정치 없는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포퓰리즘이다. 정치를 경제 논리에 종속시키려는 신자유주의에도 저항해야 하듯, 유물론적 세계관을 앞세워 정치를 토대의 반영이나 역사법칙에 지배받는 상부구조로 보는 것에 굴종하면 안 된다. 정치는 정치다.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인간 활동이다.
정치는 변덕스러운 여론에도 대항해야 하고, 여론조사를 신봉하는 태도와 거리를 두어야 제 역할을 한다. 그런 정치를 이끄는 정치가는 시민이 믿고 따를 지도자이지, 여론을 추종하고 또 여론에 아첨하는 자가 아니다. 정치는 여야와 동료 정치인들 사이에서 협의와 조정, 숙의, 심사, 의결의 방법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서로 등지고 돌아서 여론에 호소하는 일이 많아지면, 어떤 사회도 적대와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정치 일반에 대한 야유와 조롱을 키우는 부작용만 낳는다.
정치를 부여잡음으로써 인간은 ‘자연적 자유’를 상실했지만 대신 ‘시민적 자유’를 얻었다고, 장 자크 루소는 말한 바 있다. 덕분에 ‘시민됨’을 뜻하는 문명(civilization)을 발전시켰고, 자연의 법칙이나 신의 왕국에는 없는 개성 있는 이야기(story)를 모아 역사(history)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도 신을 기쁘게 할 세상, 정의가 실현되는 시민 공동체를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가 그 일을 했는가, 행정이나 법률가가 그 일을 했는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보듯, 그 일은 정치가라고 불리는 시민 지도자들이 해냈다.
3.
민주주의보다 정치가, 정치보다 인간이 더 넓은 세계다. 민주주의자든 정치가든 인간이 못 됐다면 상종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은 거꾸로 이해될 때 참된 의미를 갖는다. 즉, 민주주의자도 정치적 이성을 존중해야 하며, 정치가의 실천이성 또한 인간론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정치론 없는 민주주의론은 편협하다. 인간론 없는 정치론은 세상을 널리 구제할 수 없다. 정치론은 인간론에 토대를 둘 때 강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주제로 시작된다. 인간은 영문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내가 누구이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목적 있는 삶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나 신념을 행위의 동기로 삼는 인간, 그런 인간이 부여잡은 것이 정치다. 따라서 목적 있는 삶을 살고자 하면서 정치의 역할을 부여잡지 않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인간 이하이거나 인간 이상일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보여주려 노력했듯, 정치 없는 자연상태에서의 삶은 “외롭게 궁핍하고 냄새나고 게다가 짧기까지” 한, 죽음의 그림자를 벗을 수 없다. 누구도 정치가 작동할 수 없는 무(無) 국가 식민 상태나 난민의 삶, 무정부 상태에서의 시민 간 내전의 삶을 권할 수는 없다. 정치의 역할 없이 균형 잡힌 사회, 좋은 질서가 작동하는 사회(well-ordered society)를 만들 수도 없다. 그런 사회를 만들지 못하면 인간은 가치 있는 삶을 구현하기 어렵다. 정치는 좋은 사회, 좋은 삶을 위해 인류가 찾아내고 발전시킨, 가장 도덕적이고 최고로 윤리적인 공동 행동이다.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책 『법의 정신』을 가리켜, 법리나 법체계를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한 책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가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을 하늘에 감사했다면, 나로서는 정부가 있는 삶을 살게 해준 것을 하늘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그는 피통치자가 원하는 정부를 가질 수 있는 체제를 공화정 내지 “평등에 대한 사랑”에 기초를 둔 체제로 정의했다. 그 속에서 통치할 수 있으려면, 요즘 언어로 말하면 정부를 잘 운영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법의 정신』은 다루고 있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좋은 인간(political good man)”을 소망한다. 종교 윤리나 일반적인 사회윤리와는 다른, 혹은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의 “정치적 덕성(political virtue)”을 갖춘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에게는 그저 좋은 인간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에 더해 정치적으로 좋은 인간이어야 한다. 그에 맞는 정치적 덕성과 능력, 책임성을 가져야 좋은 정부를 이끌 수 있다. 그래야 시민들 또한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몽테스키외의 이론은 인류 최초로 세습 군주와 귀족이 없는 공화정을 ‘헌법의 설계’를 통해 만든 미국에서 실천되었다. 헌법 초안을 작성했던 제임스 매디슨은 자신들이 한 일을 가리켜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천사에게 정부를 맡길 수 없다.”라는 전제에서 이루어진 일로 설명했다. 정부는 통치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통치가 자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그 내부로부터 견제되어야 한다. 정부는 정부로되 피치자들로부터 적법한 동의의 절차를 밟아야 하고, 그 뒤에도 정부의 자의적 권력 행사가 그 내부로부터 제한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법을 만드는 기능과 법을 집행하고 적용하는 기능 사이에 견제와 균형이 작동할 수 있는 설계가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이 헌법제정회의가 열린 1787년 여름의 4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위원들 간의 상호 제안과 토론, 조정과 타협을 거쳐 이루어졌다. 인류 역사에 존재한 적이 없던 대통령제 민주주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자신들의 정부를 만들 수 있었기에 미국은 민주주의 역사의 한 장(章)을 채울 수 있었고, 미국인들은 정부가 있는 삶에 감사할 수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자신들만의 정부를 만드는 데 실패했더라면, 그런 정부를 만든 정치가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은 없었을 것이다.
4.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말은 감각과 경험을 추론 가능한 지식으로 만든다. 추론은 비교와 가치 판단을 가능케 함으로써 집단의 행동을 조율하고 신의 변덕과 자연의 가혹함에 대항할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했다. 그것이 가져온 변화는 놀라웠다. 인간은 말보다 빠를 수 없었지만, 말을 기르고 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자동차보다 빨리 오래 달릴 수 없었지만, 자동차는 물론이고 그 이상을 창조할 수 있었다. 신처럼 영원할 수는 없지만, 신조차 질투하지 않을 수 없는, 유한하면서도 또 무한한 존재가 되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는 말은 창조자의 말로 통해 표현된, 인간 존재의 가장 위대한 본질을 토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말이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은 말로 될 수 있으며, 그 말을 가치 있게 하는 것에서 인간 존재의 참된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은 옳은 말이다.
정치는 말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이지만, 그 말이 다루는 수단과 도구 때문에 가장 위험한 행위다. 그것은 강제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강제는 강제로되 그것이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 모두에게 구속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무섭고도 유익한 강제다. 말은 설득을 목표로 하되 설득되고 동의를 획득한 말이 발휘하는 강제력은 그렇지 않은 강제력보다 한없이 강력하다. 제국의 제왕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수천, 수만 배 더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선출된 시민 지도자가 제왕에 가까워지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대통령도 민주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제후국이나 왕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현대 국가나 정부는 말할 수 없이 강력한 인간 조직이다. 국가나 정부란 무엇인가? 적법한 강제력을 독점한 인간 조직이다. 동의된 폭력, 합법적 폭력, 이것을 잘 다룰 때와 못 다룰 때의 차이는 반딧불과 번개만큼이나 크다. 정치가들이 이 주제를 말에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자유와 평등을 진작할 수도 있고 아니면 처벌과 복수의식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자신의 말에 책임성을 갖는 정치여야 한다. 공적 강제를 다루는 일이 책임감 없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면 세상은 지옥이 된다. 시민을 웃게 만드는 정치를 해야 한다. 그 일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치가들이 흥분하는 것, 얼굴 붉히는 것, 야유나 경멸조 언어를 사용하는 것, 앞뒤 없이 소리 지르는 것만큼 지켜보기 괴로운 것은 없다.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억지 논리를 동원하면서 저열한 말과 행동을 보이는 자들을 정치의 세계에서 퇴출하는 못하면 민주주의도 최악으로 운영될 수 있다.
정치가의 권능은 정치 없는 인간 삶이 가져올 갈등과 혼란을 줄이라고 부여된 것이다.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감추려 세상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자가 정치가다. 시민은 물론이고 주위의 동료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없으면 정치가가 아니다. 정치가는 웃음이 좋은 사람이다. 어떻게든 좀 더 나은 변화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노력하는 밝은 사람이다. 그가 있어서 좀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함부로 하고, 동료 시민들이 서로를 함부로 대하도록 선동하고, 그것으로 자신이 해야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질리게 하는 정치가에게는 불행한 미래가 들어서기 마련이다.
5.
정치는 가르쳐질 수 없다. 모든 정치철학이 그렇게 말했다. 가르쳐질 수 있다면 철학자나 정치학자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현실은 그 반대였다. 학자가 정치하는 일은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철학자들은 한결같이,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겨야 하고 정치가 스스로 좋은 정치의 길을 넓히려 분투,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대신 정치철학자들이 권했던 것은 모방이다. 앞선 선례를 모방하라, 모두 그것을 말했다. 하지만 정치철학자들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모방, 그다음에 있다. 즉, 정치가는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서 모방이 되는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모방한 누군가를 남긴다. 내 습성을 닮은 아이를 남길 수도 있고, 동료나 후배 그리고 다음 세대가 닮기를 바라는 모범으로 남을 수도 있다. 모방은 인간 세계의 보편적인 교육 방법이고, 정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이 선례가 되어야 한다. 모범이 되는 사람, 모방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정치가다. 일이 잘 안 되는 이유를 열 가지 핑계로 말하기보다, 바뀔 수 있고 좋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변화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모름지기 정치가라면 인간 삶의 변천(vicissitude)을 생각하면서 ‘반성적 성찰의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 마음이 늘 평안할 수 없고, 모두가 늙고 병들고 죽는다. 정치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정치는 한 번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나 갈등이 사라진 완전한 정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완전함을 꿈꾸는 사람의 표정과 말에는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한 냉소만 가득하다. 이룰 수 없는 것을 말하니 현실에 성실하기보다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한 개탄만 있다.
왜 그래야 하겠는가. 정치가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가능성을 위해 열의와 열정을 다해야 한다. 꾸준함의 힘을 믿어야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아낼 수 있듯, 정치가의 삶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아니, 정치가이기에 더 그러해야 한다.
6.
정치가라면 기득권과 기성질서, 개혁과 혁신 등의 용어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정치를 개혁의 대상으로 만들거나, 정치 밖 외부자처럼 말하지 않아야 한다.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선서한 의원들이 ‘개헌’을 말하고, 정치를 책임 있게 운영하라고 뽑아준 정치가들이 ‘정치 개혁’을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것은 자신들이 잘못된 법과 제도로 잘못 뽑혔음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정치를 스스로 개혁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이고, 국회와 국회의원으로서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다. 나아가 그것은 시민이 적법하게 부여한 권위를 부당한 것으로 무효화하는 일이다. 이런 자해적인 접근이 낳는 결과가 좋을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정치가가 되었다는 것은, 체제 내부에 참여해 일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 점을 이해하는 사람이 정치해야 기대되는 변화에 한발 다가갈 수 있다. 체제 밖의 시각에서 문제를 접근하는 반(反)정치의 언어는 체제 내부를 기득권으로 몰아붙이기 쉽다. 그에 굴종하면 적법하게 선출된 시민의 대표로서 정치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가들 스스로 정치를 개혁 대상으로 보는 언어 사용법은 반정치적 여론에 아첨하고 일러 대는 정치로 이어진다. 정치는 체제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선택을 뜻하고, 체제 내부에서 적법하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활동을 의미한다. 체제 운영자, 공동 통치자가 아닌 길을 찬미하는 이가 정치가일 수는 없다.
우리처럼 법 많이 바꾸고 제도 많이 바꾸는 민주주의가 있을까 싶다. 그러면 법과 제도는 존중될 수 없다. 꼭 필요한 법과 제도가 있어도, 이를 만들고 도입하는 것만 어렵게 만든다. 있는 법과 제도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그 일이 성실하게 이루어져야 그 끝에서 새로운 법과 제도를 용이하게 도입할 수 있다. 그게 정치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숙고된 판단과 합의된 변화를 마무리해주고 확정해주는 역할을 해야지, 법과 제도를 앞세워 쉽게 일하려고 하면 부작용만 커진다.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길을 내라고 권위를 주었는데, 그 일을 못 해내는 것을 제도 탓으로 돌리는 일이 습관이 되면 남는 게 없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왜 정치가에게 일을 맡겼겠는가, 제도 디자이너나 시스템 설계자, 인공지능에 맡기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일이 실현되면 좋은 정치가 아니라 ‘기술전체주의’에 다가가는 일을 피할 수 없다.
합리적 규칙과 제도적 이성에 따르는 인간 활동을 가리켜 관료행정 시스템이라 부른다. 관료제에 모든 일을 맡길 수 없듯, 합리성의 원리로만 다룰 수 없는 것이 인간 사회다. 인간의 세계는 공동의 믿음과 신뢰를 조직하는 자를 필요로 한다.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치가하고 부르며 그가 발휘하는 실천이성에 기초를 두고 통치의 역할을 맡긴다. 정치가가 관료행정 체제를 지휘하는 것을 ‘문민 통치(civilian control)’라고 하며, 민주주의는 합리적 관료가 아니라 권위 있는 정치가의 역할에 기대를 건다.
과거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민중 지도자(demagogue)에게 맡겼던 일을 오늘날에는 소속 정당을 달리하는 선출직 정치가들이 한다. 당파를 달리하더라도 시민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책임 있게 수용하고 논쟁하고 조정해서 합의된 결과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진정한 정치가가 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는 ‘정치 있는 민주주의’, 정치가들이 마주 보고 공동체의 신뢰를 높이는 정치가 필요하다.
7.
흥분하지 않고도 이견을 말하고, 상대를 모욕하지 않고도 반대 토론을 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에 맞는 내면의 힘도 길러야 한다. “반성하라”, “사과하라” 같이 타인의 내면을 헤집는 표현을 절제해야 한다. “절대”, “당장” 같은 극강어를 즐겨 동원하는 정치인은 무능력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을 다루는 일이 정치이니, 명령은 살아있게 그러나 억압과 지배는 아닌 방법으로 일해야 한다. 침착하고 다정한 시민성이 북돋아지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서로에게 칼날이 되고 흉기가 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겨야 한다.
정치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풍부해져야 한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깊은 인식이 협동과 연대의 힘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그래도 남아 있는 빈 공간은 정치가로서의 개성적 매력이나 인격의 힘으로 채우고 감당하게 해야 한다. 그런 정치가에게는 시민 지도자로서의 풍모와 기품이 있다. 민중의 적법한 대표이자, 시민이 부여한 사업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위엄이 있다.
담대함이야말로 정치가의 생명이다. 정치가는 당당해야 한다.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그래야 한다. 좋은 사람을 닮으려 노력하되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서 모방이 될, 힘 있는 개성을 만들어야 한다. 남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도 오래 기억될 일이 되겠지만, 그 길은 비참하다. 경멸되고 조롱받는 것은 정치가의 죽음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붕괴, 해체론의 언어 대신 생성론, 대안론, 형성론의 언어를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전자는 사나운 말과 사나운 표정을 요하는 일이요, 후자는 협동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일이기에 밝고 화기애애한 길이다. 시민으로부터 명예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은 그 길뿐이다. 함께 땀 흘려 공동의 사업을 도모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 정치가는 그런 존재여야 한다.
인생이란 신비한 여행이다. 한바탕의 꿈이고, 돌아갈 곳이 있는 소풍이다. 죽을 만큼 힘든 게 있으면, 다시 힘을 낼 말한 이유도 있는 법이니, 뭐든 악착같이 다가서서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이 행성에 다녀간 이유를 남기게 되듯, 정치가라면 스스로가 보여준 인격의 힘과 지도력이 명예로 남게 해야 한다. 몸은 늙어도 명예를 존중하는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 오래 지나도록 모범으로 기억하는 게 인간사다. 정치가다운 정치가가 지금처럼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도 없는 게 아닌가 한다. 세상은 정치다운 정치로 변화와 개선을 이끄는 정치가를 소망하고 있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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