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기자협회 회장_김신성_한국 체육계 구조적 폭력과 해결안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2-28 10:34 조회1,001회 댓글0건첨부파일
- 김신성_한국 체육계 구조적 폭력과 해결안.docx (16.2K) 0회 다운로드 DATE : 2022-02-28 10:34:12
관련링크
본문
한국 체육계 구조적 폭력과 해결안
김신성 한국영화기자협회 회장, 세계일보 선임기자
“매도 잘 맞는 놈이 운동도 잘해.” “어떤 경기든 무조건 이겨야 한다.”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는 체육계 인사들이 주변에 적잖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체벌 쯤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풍토 형성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삼엄한 권위주의 통치에 숨죽이던 시기, ‘스포츠공화국’이라 불린 전두환 정권의 국가주의 스포츠 정책은 이보다 앞서 군사정권의 출발점인 5·16 군사정변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군부 세력은 냉전 체제하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에 재빨리 편승했다. 1962년 국민체육진흥법 제정이 그 예다. 체육 엘리트 육성이 정책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추진되었고, 세계대회에서 메달을 따내거나 북한에 체제우위를 과시할 수 있을 만한 종목들이 전략적으로 채택되었다.
정권은 각급 학교와 지방단체, 국영기업체 등에 해당 종목의 운동부나 선수단을 운영토록 지시했다. 이를 운영하는 민간기업에는 면세 등 각종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부작용이 컸다.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동원, 엘리트체육 이면의 생활스포츠 붕괴, 특정 종목의 전략적 육성에 따른 불균형 등 국가주의 스포츠의 폐해가 1970년대 이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대중의 동요와 불만 속에서 출현한 전두환 정권은 국가주의 스포츠 정책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1981년 9월 서울올림픽 유치 결정이 계기가 되었다. 정권은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지상과제로 내걸고, 여기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았다. 통금 해제와 해외여행 부분 자유화 등 일련의 ‘자유화’조치들도 올림픽 개최를 위한 사전작업의 하나로 진행됐다.
올림픽 종목에 해당하는 ‘전략’스포츠 분야의 경우, 오로지 성적을 거두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비‘전략’스포츠 중 대중적 인기가 높은 종목은 프로스포츠로의 전환을 종용받았다.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정치적 의미를 유지하려면 스포츠 붐이 지속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가 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일상화·상업화한다는 점에서 분위기 지속에 효과적일 것이라 판단했다. 이 같은 의도에서 선택된 것이 야구와 축구였다.
1982년 3월 27일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시작된 프로야구 개막 경기는 그럴듯했지만, 불과 넉 달 전인 1981년 11월 중순만 해도 어느 팀이 창단되어 리그에 참여하는지조차 불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참여를 결정한 해태는 창단 당시 선수가 14명에 불과했다. 1981년 12월 11일 한국야구위원회가 뚝딱 만들어졌다. 집권자의 명령에 의해 7개월 만에 급작스레 꾸며진 것이다. 한국프로야구는 철저히 정치적 의도에서 출발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촉발된 정치적 위기 속에서 민중을 탈정치화 시키려는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의 우민화 도구로 쓰였다는 비판이 따랐다.
올림픽은 정권이 추구하던 정책들의 수행에 매우 유용했다. 선진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올림픽 개최는 전두환 정권의 발전주의와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아울러 사회에 대한 국가 개입도 용이했다. 88올림픽이 다가오자 ‘세계의 눈’에 띌 서울의 경관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 ‘과시’를 위한 대책 없는 대대적 철거와 재개발, 노점상 단속 등으로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1983∼88년 진행된 재개발사업으로 약 4만8000동의 건물이 헐렸고, 72만명이 철거민 신세가 되었다. 특히 개막일에 맞추기 위해 재개발을 서두르다보니 현장에선 무수한 폭력이 발생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체육계에는 메달만 따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왜곡된 정서가 형성되었다.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라는 지상과제 아래 버젓이 자리 잡은 체육계의 폭력은 30여년이 지나서도 성적지상주의로 계승되고 있다.
체육계 폭력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는 ‘침묵의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어서다. 우선 고위층의 무책임한 태도가 문제다. 그때만 모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처벌이나 대처는 자신의 선이 아닌 하위 단체에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고 최숙현 사건은 사회적 파장이 컸음에도 회장이나 사무총장 등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무책임과 무능, 비양심의 속살을 훤히 드러낸 순간이었다.
하위 단체와 현장의 분위기도 피해자 침묵을 강요한다. 우리 체육계는 지역사회와 선후배 연으로 연결된 ‘끼리끼리의 작은 제국’이다. 허물은 서로 덮어주는 것이 인정이고 의리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 속 ‘제 식구 감싸기’와 왜곡된 온정주의만 난무한다.
설령 징계를 내렸다 하더라도 다시 원위치로 복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뒤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여자 컬링 ‘팀킴’ 가해자로 알려진 한 인사는 정직 2개월이라는 낮은 수위의 징계를 받고 복귀해 피해자로 자신을 신고했던 선수들을 관리하는 신분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뻔히 보면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론화할 용기를 낼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이처럼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인 폭력 문제는 개인의 일탈 행위라기 보다는 ‘침묵의 카르텔’이 양성한 괴물인 셈이다. 구조적 문제부터 척결해야 한다. 한통속 패거리들이 장악한 카르텔부터 깨뜨려야 한다. ‘도덕적 쇄신’도 시급하다. 변화와 개혁을 이끌 고위층의 깨끗하고 투명한 도덕성이 요구된다. 패거리들의 몸통이거나 이들과 한통속인 인물이 체육계를 이끌어선 안 된다.
올림픽 메달로 통치의 정당성을 찾거나 체제의 위기를 타개하던 시대는 지났다. 메달을 위한 스포츠가 아닌, 모두의 건강과 복지를 위한 스포츠가 되어야 한다. 스포츠 강국보다는 스포츠 선진화가 중요하다. 국민 생활의 질을 높이고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걸맞은 체육이 되어야 한다.
체육계는 이제 도덕과 능력을 갖춘, 패거리 영향에서 자유로운, 무엇보다 ‘떳떳한’ 인물들을 등용해야만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