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정님(국립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 미·중 패권 경쟁의 의미와 대한민국의 푯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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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4-10 21:23 조회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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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돌아온 이후 많은 나라들이 관세 전쟁의 폭풍 속에서 저마다 살 길을 찾아 헤메이고 있다. 이 와중에도 중국은 물러서지 않고 보복 관세를 부가하며 미국과 정면 대결을 벌이고 있어 세계 경제에 그림자를 짙게 하고 있다.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국에게는 매우 괴로운 국면이 당분간도 계속될 것 같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단지 무역수지를 둘러싼 관세 전쟁에서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본격화 할 패권 경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장기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데 앞장 서 왔고,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된 이후 이른바 일극체제(unipolarity)를 구가해 왔던 미국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극체제의 틀 안에서 미국은 ‘호의적 패권국’(benign hegemon)이었다. 유럽의 전후 복구를 위해 16개국에 행한 미국의 막대한 대외원조 계획인 마셜 플랜(Marshall Plan)은 미국이 실천한 호의의 상징처럼 회자된다. 6.25전쟁에서 미군은 1950년 7월 1일에 참전하여 3년 1개월간 전쟁을 치렀고, 전사자 54,246명을 포함하여 무려 172,800여 명이 희생당했다. 워싱턴 D.C.의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세겨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유명한 글귀는 미국이 추구했던 가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유엔은 물론 다수의 국제기구들도 미국의 계획과 지원 하에 저마다의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그런 미국은 이미 없다. 그리고 바뀐 미국의 선봉장은 트럼프다. 2024년 7월 14일, 펜실베니아의 유세장에서 총격을 당한 뒤 연단에서 일어나 주먹을 치켜세우며 “싸우자!”(Fight!)라고 외친 그의 함성은 미국이 실천해 온 ‘호의’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 모든 변화의 현상일지언정, 그 자체가 원인은 아니다. 이제 그의 입을 빌어 미국은 세상을 향해 더 이상 착취 당하지 않겠노라며 동맹들에게조차 거친 방식으로 부담을 더욱 나눠 가지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변화는 결국 다극체제(multipolarity)를 고착화시킬 것이다.
다극체제 속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그 범위는 지금까지와는 달라질 것이다. 당장 유럽과의 관계도 재편되고 있다. 중국을 필두로 하는 세력권, 러시아의 영향력이 미치는 세력권, 그 밖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도 저마다 합종연횡을 펼치며, 복잡한 게임을 펼칠 것이다. 복수의 세력권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맞춰질 때까지 각자도생을 위한 치열한 수싸움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격랑의 끝에도 결국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technological hegemony)을 둘러싼 건곤일척의 경쟁은 남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의 본질은 무역 그 자체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운명을 좌우할 기술을 둘러싼 경쟁이다. 인공지능(AI)는 물론, 로봇, 양자 컴퓨터, 첨단 바이오, 우주와 관련된 기술들이 그에 해당된다. 이런 기술들은 안보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들을 만들어 낸다. 사이버 안보가 대표적이다. AI 사용이 확산될수록, 로봇을 활용한 자동화가 확산될수록,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으로 세상이 연결될수록, 해킹과 같은 공격에 노출될 확률은 높아진다. 특히 발전소나 데이터 센터 같은 주요 기간 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피해는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이렇듯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중대 안보 위협으로 부상할 수 있는 안보 분야를 가리켜, ‘신흥 안보’(emerging security)라 부른다.
모든 주요 미래 기술 분야에서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 쪽이 한 번에 완판승을 거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전혀 다른 체제를 운영하는 두 나라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치열한 바둑을 둘 것이다.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과 이창호가 겨루었듯이.... 결국 바둑판에 흑백의 돌이 가득 차도록 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될 것 같다는 얘기다. 그리고 바둑돌이 바둑판을 메워가는 동안 신흥 안보의 위협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 대한민국은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하는가?
대단히 안타깝지만 한국은 이미 실기한 측면이 있다. AI와 같은 미래 기술 분야에서 국가적 역량을 총 결집하여 분투해도 모자른데, 두 거대 정당은 서로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두 거대 정당 역시 비극적인 한국 역사의 결과물이겠지만, 천지가 개벽할 만한 기술의 변화들이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는 동안 내부 갈등으로 국력과 시간을 낭비한 한국 정치권은 역사와 국민 앞에서 깊이 반성해야 한다. 이제 이런 싸움 역시 역사의 한 장으로 넘기고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그 푯대는 결국 전쟁이 없는 한반도, 그리고 과학·기술 강국 대한민국일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 뿐만 아니라, 신흥 안보 분야에서도 한국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다. 각종 해킹 및 피싱 공격은 물론, 가상 화폐 탈취, 드론과 같은 비전통 전력을 강화하는 움직임도 한국에게는 심각한 신흥 안보 위협이다. 그러나 북한과 물리적 충돌 만큼은 막아야 하며, 그렇기 위해서는 북한의 칼끝이 예리해질수록 한국의 갑옷과 방패도 두꺼워지고 틈이 없어야 한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그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역설적이지만 그 발전에는 북한이라는 존재론적 위협이 큰 몫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한국의 기술들은 기술 패권을 놓고 중국과 세기의 경쟁을 펼치는 미국에게도 분명히 필요한 부분이 있다. 한국은 바로 그런 분야에서 꽉 막힌 형국의 활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과학과 기술에 달려 있음을 거듭 상기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역량을 모야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기술이기에 기술에 대한민국호(號)의 명운을 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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