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마상(馬上)의 절대자는 민심을 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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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12-12 10:07 조회5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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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馬上)의 절대자는 민심을 품을 수 없다
요즘 중국인들은 장쩌민 주석 시대에 누렸던 표현의 자유를 그리워하고 있다. 두 주일 전 타계한 장쩌민은 재임 중이던 1997년 11월 1일 하버드대에서 유창한 영어로 연설했다. 샌더스홀 밖에서는 “일당독재 물러가라” “장쩌민 돌아가라”라는 함성과 야유가 들려왔다. 〈뉴스위크〉 기자가 “시위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밖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하는 것뿐이다.” 청중들은 뜻밖의 유머에 웃음을 터뜨렸고, 관대함에 매료됐다. 세계가 중국의 친구가 됐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출발선
한국, 미국과 같고 중국과 다르다
대통령은 ‘핵관’ 교언영색 경계를
불편한 진실 수용해야 민심 얻어
지난달 중국에서는 ‘백지혁명’ 시위가 벌어졌다. ‘바나나껍질 새우 이끼’라는 구호가 있었다. 발음으로는 ‘시진핑 하야’였다. 검열과 단속을 피하기 위한 풍자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황제가 벌거벗고 있음을 모두가 알게 됐다”고 했다. 14억 중국인들은 저 넓은 세계의 자유를 알고 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실종된 시진핑 체제의 퇴행에 절망하고 있다.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은 1996년 현직인 장쩌민 주석과 만나 “서방에선 중국의 발전이 세계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중국 위협론이 제기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이 발전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세계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장쩌민은 이렇게 세계와 공존하겠다는 열린 사고로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지식인, 노동자·농민뿐 아니라 자본가의 이익까지 대변한다는 파격적인 ‘3개 대표론’을 선포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정당을 유럽식 사회주의 정당으로 개조한 것이다. 한국 재벌체제의 장점을 벤치마킹한 국영기업 통폐합 조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의 결단이 뒤를 이었다. 올해 미국 경제지 포춘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에 중국이 136개로 미국의 124개를 추월한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다.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체제는 불평등 해소를 위한 공동부유론을 내세웠다. 경직된 권위주의로 급선회했고, 국제사회와 불화하고 있다. 양회(兩會)에 참석해 짝퉁 판매업자 엄벌을 촉구했던 알리바바의 마윈 같은 기업가들은 존재감이 전혀 없다.
하지만 민심은 무섭다. “대중은 먹고살 만하면 민주주의를 요구한다”(No Bourgeois, No Democracy)는 배링턴 무어의 경험칙은 여전히 힘이 세다. ‘넥타이 부대’의 가세로 ‘체육관 대통령 시대’를 끝장낸 1987년 6월항쟁의 드라마가 중국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지지율 정체에서 벗어나 국정운영 동력을 회복하고 있다. 화물연대 불법 파업에 대한 엄정한 대처로 민심의 호응을 얻은 결과다. 그러나 언론과의 불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MBC 보도가 지나쳤던 것도 사실이지만 전용기 탑승을 불허한 것은 너무 나갔다. 대통령직(presidency)을 존중하지 않은 MBC 기자의 질문 태도도 문제지만 가림막을 설치하고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것도 지나쳤다. 다른 언론들에게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언론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언론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1984년 마오쩌둥주의자 그레고리 존슨이 성조기를 불태웠지만 연방대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은 “성조기를 불태웠다고 처벌한다면 성조기가 상징하는 미국의 표현의 자유가 훼손될 것”이라고 했다. 표현의 자유가 미국 민주주의의 대전제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현역 의원 71명이 몰려간 여당 친윤 모임 ‘국민공감’에서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쓴소리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 몰락 이유는) 아첨하는 집권자들 때문에 장관들 얘기나 국민들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온갖 ‘핵관’들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경계하고, 못마땅한 언론이 불쑥불쑥 제기하는 불편한 진실일수록 끝까지 경청해야 한다.
대통령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프루덴차(prudenzia)’, 즉 “정치의 다양한 상황을 이해하고 변화의 기회를 알아챌 수 있게 하는 인식의 힘”(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보여줘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정치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타협의 예술이 아니라 권력을 탐하는 시정잡배의 흥정으로 전락할 것이다.
‘검투사’ 윤석열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공정과 정의의 화신이었다.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었다. 이제는 지상(地上)으로 내려와 범부(凡夫)의 남루한 일상을 어루만져야 한다. 스스로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되어 공생애(公生涯)에 투신해야 한다. 그러면 아부꾼들의 거짓말 대신 민심의 절규만 들릴 것이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출발선이다. 권위주의 중국과 확실히 다른 점이다. 권력자에게는 불편하겠지만 권력의 오만과 일탈을 막아준다. 언론과 불화하는 마상의 절대자는 결코 민심을 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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