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주) 尹 ‘담대한 구상’ 첫걸음, 北美·北日수교 지렛대로 核 포기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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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2-03 15:26 조회4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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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담대한 구상’ 첫걸음, 北美·北日수교 지렛대로 核 포기하게 하라
2023. 02. 03 [백승주 칼럼]
- ● 1992년 한중수교 택한 장쩌민 결단
● 북핵 폐기 전제하 교차승인 논의해야
● 긴 시간 걸려도 걸어가야 할 길
● 反中 지양하고 베이징을 도구 삼아야
지난해 12월 18일 북한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포-17형’이 시험 발사되고 있다. 이튿날 북한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이를 지휘했다고 보도하며 김 총비서가 “우리의 핵무력이 그 어떤 핵 위협도 억제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또 다른 최강의 능력을 확보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뉴스1]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였던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1월 30일 사망했다. 중국 정부는 서울과 전국 주요 도시 중국 영사관에 장쩌민 주석 분향소를 마련했다. 필자는 지난해 12월 1일 서울 중국대사관의 분향소를 찾았다. 그의 영전에서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결심하고, 중국 지도자로서 한국을 처음 방문해 한중관계를 발전시킨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진행된 외교 가운데 가장 큰 뉴스 중 하나가 한중수교일 것이다. 현재 시점에선 1992년 냉전 해체라는 세계사 흐름에서 중국 지도자가 누구였든 당연히 한중수교를 단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당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과 장쩌민의 결단이 없었다면 수교는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다. 한중관계사 측면에서 수교를 결심한 중국 지도자들과 노태우 당시 대통령 및 그 이하 안보 라인의 역할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
당시 수교 준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국 지도자들은 북·중관계 손상을 상당히 고민했다. 북한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중국의 6·25전쟁 참가 결정에 직·간접으로 가담한 중국 원로들 역시 한중수교에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덩샤오핑은 한중수교를 선택했고 이를 당시 북한 지도자 김일성에게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통보할지 매우 고민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중국 원로가 김일성과 특별한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기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고심 끝에 내린 선택은 첸지첸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었다.
핵무기로 귀결한 김일성의 배신감
김일성은 1992년 한중수교 당시 매우 분개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아DB]
1992년 7월 15일 첸지첸 외교부장이 평안북도 묘향산 별장을 찾았다. 그곳에선 김일성이 중국 대표단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병현 전 주중한국대사는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일행을 기다리는 김일성의 표정엔 초조감과 착잡함이 묻어났다. 첸 부장이 들고 오는 베이징의 메시지를 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터였다. 4월 15일 생일 축하를 명분으로 평양을 다녀간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이 김일성에게 ‘한국과 관계를 정상화할 때가 가까웠다’고 운을 뗀 내용을 생각했다. 당시 김일성은 양 주석에게 ‘수교를 적어도 2∼3년만 늦춰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북·미관계가 새롭게 진전되고 있으니 ‘보조’를 맞춰달라는 취지였다. 김일성은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인정하고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교차승인(Cross Recognition)’ 구상을 다급하게 꺼내 든 셈이다. 묘향산 별장에 당도한 첸 부장과 통역 장팅옌(초대 주한 중국대사)은 김일성을 만나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장쩌민 국가주석의 구두 메시지를 낭독했다. 김일성의 예감대로 한중수교를 공식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측에 최후통첩을 한 것이다. 김일성은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숙고한 뒤 짤막하게 ‘우리는 자주 노선을 걷겠다. 중국이 하는 일은 중국이,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라고 말했다.”
김일성은 침묵 속에 중국에 대한 배신감과 새로운 체제 유지 정책을 결심했을 것이다. 핵 개발에 대한 집념이 더욱 공고해졌고, 그 의지는 김정은으로까지 승계됐을 것으로 사료된다. 한중수교 직후 북한은 덩샤오핑과 장쩌민에 대해 “제국주의에 굴복한 변절자들의 배신행위”라며 맹비난했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과 분노는 이후 평양에 대한 베이징의 영향력을 급감시켰다. 한국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에 대해 적극적 역할과 협력을 요청할 때 중국 당국은 “북한이 우리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했다.
김일성이 양상쿤 주석에게 간절하게 요청했던 2~3년의 유예기간이 거부된 이후 북한은 북·미 고위급 회담을 거쳐 1994년 북·미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북한은 북·미 합의를 통해 핵무기를 포기할 것처럼 굴면서 실제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 등 서방은 동유럽 국가들같이 북한이 공급망 붕괴 속에 단계적으로 해체의 길을 걸으리라고 오판했다. 미국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단계적 붕괴론’이 북한을 바라보는 주류 관점이 됐던 것이다.
새로운 통일 해법, 남북 교차승인 완성
로버트 스칼라피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는 1969년 ‘미국과 아시아’라는 논문을 통해 남북한 교차승인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의 1세대 아시아 연구 학자로 꼽힌다. 2011년 11월 1일 별세했다. [동아DB]
장쩌민 주석 분향소를 나오면서 ‘한반도(남북한) 교차승인 완성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냉전시대 미수교국이던 한국과 중국·러시아가, 북한과 미국·일본이 수교하는 ‘교차승인 완성 논의’가 한중수교 당시에 활발히 논의된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남북 교차승인이 처음 거론된 시기는 1960년대 말 미국과 중국이 화해를 모색하던 때다. 당대 미국의 최고 한반도 전문가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1969년 ‘미국과 아시아’라는 논문을 통해 ‘분단 쌍방의 상호 승인과 열강들의 공식 승인을 통해 새로운 평화를 창출하고 전쟁을 예방하자’고 제안했다. 스칼라피노의 제안 이후 닉슨 정부, 포드 정부 등 워싱턴은 교차승인 방식에 의한 한반도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졌다. 1974년 한국을 방문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중국과 소련이 한국을 평등하게 대한다면 미국도 북한을 승인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역대 한국 지도자들도 교차승인 방식을 통한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방안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가졌다. 1991년 남북 유엔 동시 가입도 그러한 과정의 하나로 이해된다. 유엔 가입 조건은 국가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유엔 동시 가입은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집단적 승인으로 유추될 수 있다.
현재 한반도는 ‘미완성의 교차승인’ 상태로 볼 수 있다. ‘교차승인 완성’으로 가는 마지막 절차는 미국과 북한의 수교, 북한과 일본의 수교다. 한국은 중국과 1992년, 소련과는 1991년 수교했다. 미국의 북한 승인 문제는 빌 클린턴 대통령 시기 양측 고위급 회담부터 논의돼 왔다. 2002년엔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김정일 간 정상회담을 통해 북·일관계 정상화 방안이 논의된 바 있다. 그 후 북핵 문제, 일본인 납북자 문제 등으로 교차승인 완성 절차는 더는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새해 벽두부터 핵무기 대량생산 방침으로 한국을 위협한 상황에서 미국, 일본과 북한 수교를 거론함은 민심에 어긋날 것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문제고, 필자 역시 북한의 핵 폐기 결단이 없는 수교라면 반대한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 폐기를 결심하고, 폐기 과정을 철저히 검증받는 조건이라면 적극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남북 교차승인 완성이 북핵 해결은 물론 새로운 통일의 해법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아직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이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딛게 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핵 폐기가 진행되면 “교차승인 완성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필요가 있다.
美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1991년 9월 18일 태극기와 인공기가 미국 뉴욕 유엔(UN) 본부 앞 회원국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다. 미국은 같은 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이후 한미 군사 문서에 북한 지역을 ‘점령 지역’이 아니라 ‘잃은 지역’으로 표기하고 있다. [동아DB]
역대 미국 정부는 북핵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 무기로 ‘대북제재’를 사용하고 있다. 북한 역시 고통 속에 대북제재 완화에 필사적으로 목을 매고 있다.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을 한 미국 트럼프 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과 안보보좌관을 역임한 스티브 비건은 필자와 만남에서 “미국이 유엔 제재를 완화하면 북한을 제어할 방안이 없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 시기 김정은이 진행한 기만적 남북대화, 화해 제스처도 궁극적으론 미국의 제재를 완화하는 게 목적이었다.
북한은 대북제재를 일거에 완화할 북·미수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18년 트럼프와 김정은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합의문 1항에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을 명시함으로써 북·미수교에 대한 염원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은 이러한 북한의 욕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전쟁을 치른 국가와 관계를 정상화한 경험이 상당히 많다. 대표적 경우가 중국과 베트남인데, 다만 정상화를 단번에 하진 않았다. 6·25전쟁 직후 미국은 중국의 실체를 인정했다. 1966년 민간단체 수준에서 ‘미·중 관계위원회’를 설치하고,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미중관계 정상화를 논의했다. 모색, 제재 완화, 수교 교섭 개시 등 1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79년 수교가 이뤄졌다. 또 베트남전쟁 종전 협상을 통해 베트남의 실체를 인정한 미국은 마찬가지로 제재 완화, 제재 해제, 수교 교섭 등 20여 년에 걸친 준비 끝에 1995년 7월 베트남과 수교했다.
북한에 대해선 1991년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을 ‘실체 인정 단계’로 봐야 한다. 미국은 이때부터 주요한 한미 군사 문서에 북한 지역을 ‘점령 지역(occupied are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잃은 지역(lost area)’이라고 표기한다. 북·미수교는 이 단계에서 막혀 있다. 중국·베트남 사례를 고려하면 미국은 결코 북한과 수교를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핵 폐기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북한과 수교 교섭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알아야 할 대목이다.
교차승인 - 북핵 폐기 병행
필자는 최근 서인택 한국 글로벌피스재단 회장을 만났다. 그는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비정부기구를 이끌면서 국내외에서 치열하게 대(對)대중(大衆) 통일운동에 힘쓰고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언제든지 사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상황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면 감성적 통일주의자 혹은 좌파적 통일지상주의자로 오해받기 쉽다. 위축될 수도 있건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필자에게 “북핵 문제 해결책을 독립적으로 구하려 한다면 영원히 찾을 수 없다. 한반도 통일과 연계해 해결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체제에 대한 잠정적 안전장치를 보장해야 북한은 핵을 폐기할 것이고, 북한이 핵을 폐기해야 통일로 가는 길에 필요한 숨통이 열려 통일 여건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고도 했다. 공감됐다.
이 과정에서 외교적으로 필요한 조치가 남북 교차승인 완성이다. 미국과 일본이 “진정성 있게 핵 폐기를 진행하면 수교할 수 있다”고 평양에 내미는 손이다. 중국이 북핵 폐기와 북·미수교를 맞교환하는 프로그램을 주도한다면 금상첨화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미국 간 관계가 개선된다면 한국의 대외정책 환경은 더 좋아질 것이다. 교차승인 완성과 북핵 폐기는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15년에서 20년,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느려 보이지만 창조적으로 이 길을 걸어갈 필요가 있다. 긴 안목으로 교차 승인 완성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북핵 폐기를 추진해야 한다. 동시에 교차승인 완성 이후 통일 과정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중구 주한중국대사관에 마련된 고(故)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록을 작성했다. “한중수교를 비롯하여 양국 관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영면을 기원하며, 유가족과 중국 국민에게 깊은 애도와 추모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썼다. [뉴스1]
통일 위해선 中 신뢰 필요
한국인의 반중(反中) 정서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수준이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12월 24일 미국 외교 전문매체 디플로맷에 따르면 중앙유럽아시아연구소(CEIAS) 등이 참여한 국제 연구진이 같은 해 4월 11일부터 6월 23일까지 한국 성인 남녀 1364명을 대상으로 중국에 대한 인식 등을 묻는 여론조사를 시행한 결과 중국을 ‘부정적’ 혹은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고 답한 비율이 81%에 달했다. 조사 대상 56개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높은 반중 정서는 북핵 폐기 등 외교 현안 해결은 물론 통일 환경 조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반중정서를 조장해서도, 한국과 중국 양국 국민 간의 관계가 나빠져서도 안 된다. 한국 정부뿐 아니라 중국 정부 역시 한국 내 반중 정서를 완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중수교 30주년이 되는 2022년, 북한의 반발에도 수교를 결심한 장쩌민은 사망했다. 수교하기 이전보다 더 나빠진 한국 내 반중 정서를 그는 어떻게 볼까. 1992년 수교 당시 한중 교역규모는 64억 달러 수준이었으나 30년이 흐른 지난해엔 3600억 달러로 성장했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0%를 넘는 수준이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살펴보건대 주변국의 협력과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통일에 따르는 장애물은 커진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한중 간 전략적 협력관계는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섬세하게 관리·유지·발전돼야 한다.
지난해 12월 2일 장쩌민 주석의 빈소를 윤석열 대통령이 찾았다. 윤 대통령은 조문록에 “한중수교를 비롯해 양국 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영면을 기원하며, 유가족과 중국 국민에게 깊은 애도와 추모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썼다. 이러한 윤 대통령의 조문 외교는 한중 현안 해결 및 한중관계의 미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중국을 앞세운 교차승인 완성과 북핵 폐기 맞교환을 한번 해보자. 중국의 관심을 기대해 본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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