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정치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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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10-27 13:31 조회5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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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의 기초
1. 통치(Government) : 정치의 목적은 정부를 운영하고 통치를 주도하는 것에 있다. 정부나 통치를 뜻하는 영어 ‘government’는 ‘아름답고 안전한 항구로 배를 이끄는 것’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공동체를 배로 비유했고, 항해를 위한 기능과 역할을 조율하는 것을 통치라 정의했으며, 그런 통치에 필요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Eros’라 불렀다. 어떻게 하면 좋은 통치가 가능한지를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가슴 뛰는 인간 활동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통치란, “인적-물적-재정적 자원의 재배치를 통해 사회 구성원을 국가로 통합해내는 정책적, 제도적 행위의 총체”로 정의된다. 여러 통치형태 가운데 민주정은 특별하다. 선출직 시민대표들이 입법과 예산 그리고 재정이 중심이 된 공공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일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왕정에서의 세습 군주나 귀족정의 지배 계급을 대신해, 민주주의에서라면 통치자의 역할은 시민이 선출한 정치가가 한다.
정치가가 정부를 운영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구현하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의 정치가들은 그 역할을 하고 있을까. 정치하는 일을 사랑하고, 통치하는 일을 가슴 뛰는 활동으로 삼으며, 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문제부터 따져볼 일이다.
2. 권위(Authority) : 권위란 구성원의 순응을 이끄는 정당한 공적 명령, 혹은 이를 수용하는 시민의 심리 상황을 의미한다. 적법한 공적 명령을 시민이 자신의 것(author)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민주 정치의 권위(authority)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권위가 없다면 순응은 강제되고 적나라한 권력 행사 또한 불가피해진다. 그 점에서 권위는 ‘동의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민주정의 핵심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부를 운영하고 통치를 이끄는 권위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인적, 물적 자원의 재배치를 누가 주도하는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선출직 정치인이나 국회, 정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통치 기획은 누가 하나. 정당도, 국회도 아니다. 정당은 선거 관리는 하나 통치하지는 못한다. ‘예산의 작성 및 통제권’은 국회에 없다. 대통령제의 원형 국가인 미국조차 의회에서 예산안 처리가 무산되면 행정부는 일시적으로 셧다운 되는데, 우리는 그만한 권위가 국회에 없다. 정책과 예산의 기획은 국가 관료제가 한다. 기획 권한이 없는 국회의 국정 감사 기능은 사후적 측면이 강하다. 예결산이든, 국정 감사든 그마저도 여야 합의가 안 될 때마다 국가 관료제의 권위는 더 강해진다. 과연 우리는 의회민주주의 국가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수준이다.
지금 우리 현실은 정당이 정부 운영을 책임지는 정당 정부(party government)와 거리가 멀다. 대통령은 집권당의 권위를 실현하는 정치인이기보다, 의회민주주의나 정당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일 때가 많다. 5년 내내 비서실을 앞세워 일하는 동안, 관료제의 권위만 키우고 시민사회를 극단적 지지와 반대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것 이상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정당, 국회의 권위가 약하면 민주주의는 뭘 해도 소모적 논란만 키울 뿐,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실체적 변화를 만들 수 없다.
3. 비전(Vision) :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 책임 정치’의 원리로 움직인다. 대통령도 정당 후보로 권력을 위임받는다. 국회 운영도 정당(교섭단체)들이 주도한다. 국회의장도 지원기관장도, 상임위도 사실상 정당들이 결정한다. 그렇지 않고 개인으로 대통령이 되고 개인으로 의장이 되고 개인으로 위원장이 되고 개인으로 국회의원이 된다면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엘리트 지배체제 내지 현대판 귀족정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나 정치인이 권위가 없다는 것은 그 전에 정당이 권위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정당이 권위가 없다는 것은 그 전에 정당이 통치 집단으로서 안정된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전이란 무엇인가. 비전은 문제를 보는 ‘각도’에서 온 말이다. 가난한 시민의 관점에서 정치를 볼 것인지, 중산층의 관점에서 정치를 볼 것인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가장 오래된 정치 비전이다.
정치에서 비전이란 통치 행위를 주도하는 행위자 집단이 내놓아야 하는 ‘공적 약속’이다. 정당들이 시민에게 권력을 위임받고자 하면서 내놓은 ‘사회 기획’ 내지 ‘공동체 기획’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정당들은 비전 집단일까. 정치인들은 그런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동기나 소명감에 이끌려 정치를 하고 있을까. 정당은 늘 위기를 겪고, 그때마다 비대위 구성을 반복하는데, 대체 무슨 비전을 추구하는 집단이라 할 수 있을까.
19세기 초중반 영국 정치를 이끌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규정했듯, 정당이란 ‘정견의 조직자’ 역할을 해야 한다. 안정된 통치 비전으로서 정견이 없다면 사실 정당이라 할 수도 없다. 정당의 통치 비전 없이 관료제를 권위 있게 지휘할 수 있을까. 그런 정당에서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가 나올 수 있을까.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4. 의제(Agenda) : 한국은 더이상 3세계 국가나 개발도상 국가가 아니다. 후발 국가라며 양해를 구하거나 알리바이를 댈 수 없는 지위를 갖게 된 지 오래다. 자율적인 동시에 책임 있는 국가로서 감당해야 할 정치적 의제들은 이미 우리 앞에 모두 놓여있다.
첫째, 외교 및 국제 분야의 정책 의제에 대한 관리 능력을 키우지 않고 미래를 만들 수는 없다. 동맹과 실리 사이에서 정권에 따라 방황하는 일을 계속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는 일국적 현상인 적이 없다. 탈냉전과 세계화로 특징지어지는 ‘민주화 세 번째 물결(the third wave of democratization)’ 시기에 한국이 민주화되었다고 하듯, 어느 한 나라의 민주화나 민주주의 운영은 국내 정치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년에 들어와 어느 정당, 어느 대통령이 외교 관련 국제적 감각이나 비전, 의제 능력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를 생각해보면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정치의 꽃은 외교에 있고, 외교론 없는 정치는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다.
둘째, 고용인구가 100만 명 정도에 불과한 10여 개의 대기업 집단에 한국경제가 과잉 의존하는 문제도 생각해볼 일이다. 부동산 널뛰기와 자산 불평등 구조 아래 금수저, 흙수저 타령만 있는 한국의 계층 구조도 돌아볼 일이다. 젊은 세대의 대출 및 투기 열풍은 정부도 정치도 믿을 수 없다는 그들의 무의식을 말해준다. 농업과 농촌이 미래를 갖지 못한 우리의 지방 현실에서 자치와 분권만 외치는 것도 공허하다. 산업보국(産業保國)과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기초 위에 녹색성장과 그린뉴딜을 얹힌다 한들 권위주의 시대의 발전모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어 보인다.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균형 있게 참여할 수 있는 내재적 발전론 없이, 국가 순위가 몇 위인지에만 매달리는 총량 성장론의 지속은 한계가 있다.
셋째, 선도국가, 포용국가, 혁신국가 같은 국가주의 담론은 있어도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사회 담론은 없는 점도 생각해 볼 때다. 늙었다고 천대받고, 삶의 미래가 없어 자살하고, 50인 미만의 하청 기업에서 대부분의 사망 사고가 일어나고,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가난한 시민들의 소리 없는 절망만 고착되고 있는 사회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선거 때만 되면 세금을 깎아주고 개발 예산을 더 투입하고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약속 말고, 우리가 직면한 공동체적 의제들을 어떻게 개선해 갈 수 있는지를 담은 체계적 정책 프로그램을 보여 준 대통령 후보는 점점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복지국가를 향한 의제는 공허한 말만 남았다. 재분배나 사회 통합의 의제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
넷째, 시민문화의 성숙 역시 중요한 의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두가 화가 나 있고, 모두가 억울해한다. 협력과 조정 대신 고소 고발과 소송을 남발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사회로의 급락을 막기 위해 정치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역으로 이런 사회로의 퇴락에 정치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정치가 그간 있던 시민사회의 힘마저 양극화시키고 분열시켜 온 것은 아닌지도 돌아봐야 한다. ‘돈과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의 공간’으로서 시민사회의 발전이 없다면,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로 빠져드는 것은 필연적이다. 공존과 관용의 시민문화를 진작하기 위해서도 정치의 좋은 역할이 필요하다.
다섯째, 다르기에 싸우는 것이 정치의 모든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달라서 협력하고 달라서 조정하고 협상할 수 있는 다원적 정치가 가능해야 한다. 2016년 촛불집회는 진보와 온건 보수 전반을 아우르는 ‘시민 대연정’이었다. 국회의 탄핵소추는 네 개 정당의 ‘정치동맹’이 주도했고 전체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참여한 ‘정치 대연정’이었다. 19대 대선은 어느 정당에도 과반 득표를 허용하지 않음(민주당 41.1%, 새누리당 30.8%, 국민의당 21.4% 정의당 6.2%)으로써 ‘온건 다당제 속에서 합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라는 시민의 요구였다. 그런데 이후의 상황 전개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촛불 ‘합의’는 촛불 ‘혁명’이 되었다. 다당제는 극단적인 양당제로 퇴행했다. 시민 대연정은 ‘문빠·태극기부대·광화문집회·서초동집회·이대남·개딸·극렬유투버’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민주주의도 산다.
정치도, 통치도, 권위도, 비전도, 의제도 없이 여론과 팬덤을 쫓아 방향 없이 부유하는 민주주의로 퇴행한 것은 아닌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의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지 숙고해야 할 때다.
5. 조직(Organization) : 민주 정치는 혈통과 세습의 원리가 아닌, 선출과 동의의 원리로 작동한다. 힘없는 다수도 조직화의 방법으로 원초적 상황을 사후적으로 개선해 갈 기회가 있는 체제라야 민주정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민주 정치로의 전환은 정당과 노동의 조직화 역할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의 민주화는 달랐다. 대학의 학생운동이 그 역할을 주도했다. 한국 사회의 중심은 이들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이다. 이들은 권위주의 체제가 만들어냈고 민주화 이후에도 변함없이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최대 사회 집단이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수혜자 집단이자 민주화의 주역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묘한 지위를 갖는 집단이다. 한편으로 개혁적이고, 다른 한편 급진적 변화를 막는 방어벽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이익과 열정을 설명하고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나 정치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사회 집단이다. 이들이 시장경쟁이나 능력주의에서 앞서 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민주 정치마저 이들에 의존적인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정작 민주 정치의 도움이 필요한 사회 하층 내지 가난한 시민들은 한국경제에서는 물론 한국 정치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그들은 세금조차 면제된 빈곤 집단이자 투표율도 낮은 우리 사회의 저변 집단을 이루고 있다. 정치 참여에서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정치마저 무관심하다면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개선하고 좀 더 고른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평등화의 계기를 확대해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저변 집단들은 ‘어려울 때 사회나 정부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인 답변은 소득과 학력에 비례해 올라간다. 우리 사회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시민들은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을 시민됨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해 본 경험이 적다. 반대로 교육받은 중산층들은 정치와 정부, 정책을 영악할 정도로 잘 이용한다, 8년 전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의 2022년 판 같은 올해의 수원 세 모녀 자살 사건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사회의 공동체성은 과연 강화되고 있는 걸까? 지금 우리는 가난한 시민들이 모멸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9백만 명에 가까운 당원을 가진 한국의 정당 정치, 260만 명을 넘어선 양대 노총 조합원을 가진 한국의 노동운동에도 불구하고 왜 가난한 시민에게 가혹한 ‘불평등 민주주의(unequal democracy)’는 더 심화되고 있는지 의아할 때가 많다. 정당과 노동조합마저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의 이익과 열정만을 조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본다.
6. 제도(Institution) : 그간 한국 정치는 끝없이 제도 개혁을 했다. 그렇게 해서 달라진 제도들은 과연 정치를 좋게 만들었을까? 입법을 동반하는 제도화란 ‘욕구 없는 이성의 체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제도를 둘러싼 그간의 갈등은 욕구의 산물이었을까, 이성의 산물이었을까. 우리식 제도 개혁이란 일종의 제도 전투(institutional combat)였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안정된 제도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의 권력 투쟁’에 가까웠다.
정치는 ‘제도 이성’보다 ‘실천 이성’이 중요한 인간 활동이다. 제도 변경 이전에 긴 실천적 모색과 조정이 있어야 하고, 그 결과로 제도 변화가 이루어져야 좋은 의미의 제도화가 가능하다. 기존 제도하에서도 변화의 필요에 부응하는 행위 조율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조율된 상호 작용을 거치며 갈등하는 이해 당사자들이 ‘새 제도에 적응하는 데 드는 비용과 대가를 내부화(internalization of social cost)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을 때 이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제도 개혁이어야 한다.
법과 제도를 자주 바꾸지 않아야 정치의 공간을 넓힐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은 습관이 될 때 가치가 있으며, 법을 자주 바꾸면 법에 대한 존중은 파괴된다고 경고한다. 요컨대 입법이 남발되거나,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심화되면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신뢰와 협동의 가치는 살아날 수 없다. 입법이 늘면 이를 운용하는 관료제의 예산과 인원, 권한이 확대된다는 역설을 고려해야 한다. 1,500개를 넘어 1,600개 쪽으로 늘어난 법률의 수가 말해주는 것은 법체계의 성숙이나 안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법률의 ‘양산’과 ‘남발’ 쪽에 가깝다. 법을 바꿔 영향력을 추구하는 게임이 구조화되면 법 전문가들과 그들의 전문성을 구매할 수 있는 사회적 강자들이 승자가 된다.
법과 제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법과 제도, 정책, 조치를 운용하는 정치의 힘이 약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누가 우리의 의원들을 권위 있는 정치 행위자로 보겠는가. 지역구 이익과 재선의 기회에 연연하는 유사 자영업자 내지 한시적 임기를 갖는 개방형 공무원에 가깝게 여길지 모른다. 국회도 다르지 않다. 실질적 자원 통제자인 국가 관료제를 불러내 가끔 야단치고 화내는 것 이상의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의원 개인들이 가입해 있는 프랜차이즈 업주 내지 정부 교부금에 의존하는 유사 공기업에 가까울 뿐 통치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정치가 권위를 가져야지, 양적 입법 성과나 새 제도 도입에 과잉 의존하는 일로 정치 에너지를 허비할 수는 없다.
늘어나는 법 개정과 그에 따라 또 늘어나는 새로운 시행령과 규칙의 체계 속에서 대민 업무 담당자가 정책 수요자를 도울 자율의 공간은 만들어질 수 없다. 복잡해지는 법체계와 엄격한 시행 규칙 때문에 일부 민원인을 화내고 소리 지르는 한편, 정작 도움이 필요한 민원인은 정부나 지자체, 공공 정책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만드는 지금의 대민 행정 방식은 법체계의 정비 없이 법의 부분 개정과 그에 따른 시행 조치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바 크다.
7. 말(Words) : 정치는 말로 하는 인간 행위다. 말이 가치 있을 때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이 정치다. 말이 나쁘면 정치는 세상을 분열시키는 흉기가 되고, 사회를 핏기없는 권리 주장의 쟁투장이 되게 만든다. 말로 먼저 ‘가능의 공간’을 여는 것에서 정치는 시작된다. 과거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치가들은 말 말고 달리 가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말로 뜻을 모으고, 말로 사람을 모으고, 말로 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변화를 보기 어렵다. 지금 자기 말을 하는 정치인이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말로 비전을 세우고 의제를 골라 펼쳐, 정치의 힘을 보여주는 정치인은 있을까. 정치뿐 아니라 정치가가 실종된 민주주의,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정치를 망치는 것으로 위세를 떨치는 사람들이 주목받는 잘못된 민주주의,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의 말이 정치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하고, 세상을 지치게 만들고 있는데도 이에 대해 왜 항의하는 정치인은 없는지 모르겠다.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도 정치인은 있었고, 그들은 “목을 비틀어도” 말을 했는데, 왜 민주주의 시대에 정치적으로 존경할만한 말의 권위를 느끼게 하는 사람은 점점 더 없어지는 걸까. 지금 우리에겐 민주 정치의 힘을 보여주는 정치가의 말과 행동이 필요하다. 사나운 말보다, 정치적 이성이 뒷받침된 품위 있는 말을 가진 정치가가 존경받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정치의 기능이 살아날 수 있다.
기업이 1원 1표의 불평등 원리를 통해 경제 발전과 성장을 이끌고, 국가 관료제가 위계적 통제 원리로 성과주의와 능력주의를 심화시키는 것에 대응해, 민주 정치의 종사자들이 갈등 조정과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해 줘야 공동체도 개인도 좀 더 평등한 삶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세상을 좀 더 자유롭고, 건강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 수 있다. 정치는 문제이기보다 대안이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 있지, 정치를 없애는 데 있지 않다.
제대로 된 정당 만들기, 정부 운영의 책임성을 실천할 집합적 실력 키우기, 법치가 아니라 정치를 하기,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를 키우고 침착한 시민성을 북돋기, 통치의 권위를 발휘할 수 있는 비전 만들기, 그에 합당한 정책 의제를 체계화하기, 민주주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조직하기, 우리 현실에 맞게 오래 갈 수 있는 법 제도를 충분히 심의하고 숙고해서 만들기, 정치를 파괴하는 언어의 사용을 절제하기 등 정치에서 필요한 변화의 목록은 하나같이 다 가치가 있다. 그 가운데 정치가 ‘가능성의 예술(the art of possibility)’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말의 힘을 키우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좋은 말로 정치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거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 정치란 말을 가진 인간이 말로써 목적 있는 삶을 구현하고자 분투하는 아주 특별한 집단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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